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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어린이 위인전 - 2003-09-19

쥔장부부 2011. 11. 28. 22:01

간디에 관한 책을 읽고 싶다 했더니
혜미가 과외하는 아이 집에서 어린이 위인전을 빌려 왔다.
그의 독립 투쟁 과정에 벌어진 각 단체간 분열의 모습이나
간디 개인의 사상에 대한 부분이 생략되었지만
연대표적 서술이 그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몇가지 상황과 사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1869년 간디 출생 본명: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 인도는 아프칸계(이때는 열나 잘 나갔나 보다) 로디왕조에 와서 인도의 모습을 갖추는 통일을 이루었으나 1526년 무굴제국계의 무칼왕조가 인도를 섭렵했다. 이들은 이슬람계였다. 이후 1857년부터 영국의 식민통치가 진행되었다. 당시 인도의 종교는 힌두, 이슬람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 카스트 제도
  * 브라만: 힌두교 승려
  * 크샤트리아: 왕족, 귀족
  * 바이샤: 농,상계
  * 수드라: 노예
  파리아: 불가촉 천민(만지지도 말아야 할 더러운 천민이라는 뜻. 카스트 제도에서조차 제외된 계급)

간디의 유년시절을 보면 무척이나 연약하고 드러나지 않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가정 환경은 장년 이후 그의 투쟁에 깊은 영향을 키칠 만큼 제대로 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모친은 독실한 힌두교 신자로 그의 단식투쟁은 모친의 종교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 서술한다.

두각을 보이지 않던 그가 독립 투쟁의 선봉장이 된 것은
인도가 아니라 남아공의 투쟁때문이었다. 영국 유학을 통해 변호사가 되었고 귀국 후
남아공의 인도계 회사의 변호사직을 맡게된 간디는
당시 남아공에서 천대받던 인도인의 처우 개선을 위해 투쟁을 조직하였다.
그의 법율적 지식이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자명하다.

1914년 드디어 남아공에서 인도인구제법이 가결되고 3파운드의 인두세법이 폐지되는 성과를 이루게 되어
그의 인지도가 영국과 인도에 퍼지게 된다.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하고 여리고 남 앞에 나서서 이야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던 그가 동포들의 핏박 받는 현실에 몸을 던진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아마도 종교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거짓 종교인이 아니었고 언제나 교리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비폭력 투쟁, 단식 투쟁은 '사타그라하'라 칭하며 이는
인도 전통적인 집단 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남아공에서부터 사타그라하는 시작되었다.

간디의 선택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것은 남아공의 선방 이후
그의 영국에 대한 인식변화이다.
1914년 1차 대전에서 그는 야전 위생대를 구성하여 영국군으로 참전하였으며
1917년 영국 인도사무장관 몬테그의 독립 약속을 지지하였다.
대부분 영국과의 대립적 관계를 주장하는 분위기에서 그는 유독 전시 영국에 협조적이었으며
전쟁 종식 후 자치를 요구하겠다는 입장이었다.

1917년 혁명 전 러시아의 볼세비키는 자국의 전쟁 패전을 주창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식민 당시 독립 운동가들의 일본의 전쟁 승리를 주창하였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친일파가 간디와 별다를 바 없는 입장이었다면
우린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역시 역사는 '가정' 없는 '결과주의'이다.
결과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그는 몬테그의 약속이 사기라는 사실이 판명되자 사타그라하 투쟁을 전국적으로 벌이게 된다.
영국의 식민통치도 무척이나 극악하다. 1919년 영국은 시위중인 인도인 379명을 학살하는데 이를 암리차르 학살이라 한다. 이때 부상자는 1천 2백여명에 달한다.
당시 독립운동단체의 중심을 네로를 수장으로 하는 국민회의파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인도 전역은 자생적 폭력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간디는 스스로 사타그라하 투쟁의 중지를 선언한다.
이 폭력 투쟁은 대 영국 뿐만아니라 힌두교와 이슬람간의 투쟁까지 확대되었다.
47년 8월 15일 독립 이전까지
간디는 수차례 투옥되었고 단식을 진행했다.
당시 언론과 통신 수단의 저열함에 비추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어떻게 3억 8천만이라는 인도인의 행동을 촉발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때론 그의 비폭력 비협력 투쟁은
결과적으로 인도인의 폭력 투쟁만을 양산한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이후 이슬람 파키스탄의 독립이나 힌두교 극우파에 의해 암살되는 그의 종말에서도
비폭력, 비협력 투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폭압적 지도 행위를 낳았고
그로 인해 인도인의 폭력 투쟁은 더욱 게세게 일어났다.
또한 그의 투쟁은 세계여론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계산도 포함되어있었다.
투쟁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냉철한 계산 없이 남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소 (2003-09-20 08:32:25) 
잘 읽었다. 역시 정리맨 이로군.
간디가 계산을 하고 있었는지는 난 잘 모르겠구나
그가 옳다고 생각한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았을 수도,  
 
 
규 (2003-09-20 11:57:37) 
강조하지 않은 것 중의 하나는
아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헌신적인 솔선수범적 투쟁이다.
영국의 소금법(소금은 반드시 영국에서 수입하여 소비한다) 불복종에서 시작된 그의 국산품장려운동은 '물레'로 상징된다.
투옥중에도 그는 물레질을 멈추지 않았다.
난 이 또한 종교의 힘으로 생각된다.
제대로 된 종교 생활은 인간의 능력과 행위의 가치를 한층 드높일 수 있음이 또다시 확인된다.  
 
 
소 (2003-09-20 12:48:12) 
그는 너의 말처럼 그의 개인적인 행동양식 자체가 사회적인 변화로 귀결될수 있도록 만든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 된다.
종교적이며 개인적인 수양에만 집중하는 부류와 완전히 사회적인 변혁에만 치중하는 부류의 중간적인, 그래서 참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구나.  
 
 
규 (2003-09-24 09:56:37)  
 "역시 역사는 '가정' 없는 '결과주의'이다.
결과가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인간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그의 일생에 대한 평가이다.
그의 사상이나 행위는 그 나름의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가 되어야 한다.
친일파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친일 행적의 비판이
그의 삶 전체에 대한 평가가 될 수는 없다.

드골이 2차 대전 후 그 수많은 위대한 문인들과
학자들을 독일에 빌 붙었다는 이유로 처형한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는
난 아직 판단하지 못하겠다.
역사는 과연 후대가 평가하는 것일까?
가끔은 현재가 현재를 평가하는 것만이 의미가 있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