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샤를리다!”의 빈자리 / 홍세화
[특별기고] “나는 샤를리다!”의 빈자리 / 홍세화
http://hani.co.kr/arti/opinion/column/675892.html?_fr=mr1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비롯하여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등이 양팔을 껴안고 파리 대로를 200미터가량 행진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과문의 탓인지 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를 핑계로 이라크를 침략했을 때나
그로 인해 어린이들을 비롯하여 수십만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
“우리는 이라크인이다!”라는 제목의 사설을 썼다는
서방의 - 진보를 표방하는 매체를 포함하여 - 언론에 관해 들어보지 못했다.
나 같은 관찰자에게 다가오는 물음은
샤를리 에브도가 ‘펜’이었다면 ‘어떤’ 펜인가에 있다.
가령 샤를리 에브도에 대해 이스라엘 출신 영국 지식인 길라드 아츠몬은
“시온주의 전쟁을 지지한 네오콘, 친유대 잡지로서 소수자와 특히 이슬람을 타자화하는 데 헌신해왔고
그동안 유대인들의 권력이나 미국이라는 전쟁 기계에 대한 비판에는 침묵해왔다”고 지적한다.
그는 심지어 샤를리 에브도를 가리켜 “파리에 파견된 이스라엘의 문화담당관처럼 행동해왔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본디 ‘진실과 공익의 추구’라는 말과 결합될 때에만 유효한 것
<세계의 진실을 가리는 50가지 고정관념>의 저자 파스칼 보니파스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으로
‘전문가에게 맡기기’와 ‘단순화하기’를 들었는데,
특히 단순화하기는 사이비 언론의 선정성과 만나면서 우리로 하여금 섬세한 안목을 갖게 하는 대신
‘선과 악’, ‘흑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 틀에 갇히게 할 위험이 크다.
이 점은 최근 신은미, 황선씨의 북한 방문 이야기를 ‘종북 콘서트’로 규정하면서
신씨가 하지도 않은 말을 자극적으로 뱉어낸 종편을 통해서 저급한 형태로 증명된다.
오늘날 테러 행위를 주도한다고 지목되는 이슬람근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수혜자들과 적대적 공생관계에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샤를리 에브도는 과거의 좌파 언론조차도 오늘날엔 이 적대성을 물적 토대로 삼고 있다는 예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