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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by 미 2003-09-05

쥔장부부 2012. 11. 16. 17:42

나두 오늘 '칼의노래' 다 봤다.
마지막에 명나라 때문에 씩씩 거리면서...

교과서에는 '오랜 전쟁으로 인구가 격감되고, 농촌이 황폐해졌다'라고만 쓰여있는데...
그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이 서려있는지...

백성들이 진심어린 마음으로 육포를 만들어 바치고,
검을 만들어 바치고 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그 당시를 내가 살았다면 나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 앞에 엎드려
울 수 있는 백성이었을까?

난 아마 '다모'처럼 무술이 뛰어난 여자 의병 장군이 되어서 왜구를 무찔렀을지도 몰라...
나 쿵후 잘했다는 거 알지?
아니면... '여진'과 같은 운명을 살았을지도...

이순신 장군님의 품은 따뜻했을까?



추신) 혹시 '칼의노래' 보실 분들은 아래 제가 적어 놓은 역사적 사실을 먼저 읽고 나서
소설을 읽으시면 좀더 재밌게 읽으실 듯 하네요.

그런데 조,명 연합군에 관련한 부분과 왜군의 퇴각 이유는 너무 교과서답게 씌여 있네요...


< 국사책에서 옮깁니다. >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국방력이 점차 약화되어, 중종 때에는

3포 왜란을 비롯하여 왜구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비변사를 설치하였고,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적극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장기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이

수습되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국내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1592년 4월, 왜군이 침략해 왔다. 왜군이 침략해 오자, 부산진과 동래성에서는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하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이에 충주에서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무기와 전력의 열세로 패하였다.

조선 조정은 왜군을 피하여 의주로 피난하였으며,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북상을 거듭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침입하였다.



육지에서는 전세가 불리하였으나, 경상도, 전라도 해안의 경비를 담당한 수군은 왜군의

병참 지원을 담당한 일본 수군의 침략을 저지하였다.

왜군의 침입이 있기 1년 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저장하였다.

그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8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도 대승하였다. 마침내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게 되어,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을 좌절시켰다.



이러한 수군과 의병들의 승전으로 전황이 역전되면서 왜군을 격퇴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여 명군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조, 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수복하고 왜군을 남으로 내몰았다. 이 때 권율은 행주 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후 전쟁은 소강 상태에 이르고, 휴전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달라서

3년간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고, 다시 왜군이 침입하였다. 이에 조선군과 명군은 왜군을

명량으로 유도하여 일대 반격을 가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또다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점차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수군은 도망하는 왜선 수백 척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이순신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란은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