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영화 세상

[칼의 노래]-김훈 2003-09-05

쥔장부부 2012. 1. 6. 22:07

꽤 오래 전부터 함 보려 했지만 기회가 없었다.
마눌님의 도서 쿠폰 덕으로 2권을 사다가 날름 읽어 버렸다.
아쉬운 건 인터넷에서 보니 합본권이 있었던 사실이다.
거의 책 한권 값으로...
그도 그럴 것이 2권짜리를 보면 글자도 무지 크고 줄 간격도 넓어서
본전 생각이 나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죽 읽어 가다보면 시원 시원한 줄간에서 남해와 목포 앞바다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이중의 의미로 다가온다.
박정희라는 군사 독재자에 의한 과도하게 신격화된 위인이라는 의미와  
실제 그는 위대한 장군이었다는 주장 사이의 혼돈이다.

사실 그는 명량해전이나 노량해전만 놓고 보더라도
명장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백의 종군 첫 전투였던 명량해전에서 130여척의 왜선을 상대한
그의 배는 불과 12척이었다.
길거리 패싸움을 해도 12명과 130명이 붙는건 상상하기 어렵다.
수군 통제사였다고 하지만 임란 오래 전부터 부임한 장군이 아니라
그는 변방의 육군 출신이다.
뛰어난 상황 대처 능력, 강력한 통솔력, 기발한 작전 능력
이 모두는 그의 두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김훈이 밝히듯이 그가 실제 어떤 '사람'이었는지 사실 알길은 없다.
그런 이유로 딱딱한 '난중일기'에 온갖 상상력을 들어 부은 소위 '위인전'에서 우린
'소설 이순신'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모함이 어찌되었든,
그는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다가섰던 죄인이었다.
선조는 그에게 의지하면서도 결코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이순신은
바다 앞에도 자신을 베려는 적이 있고
등 뒤에도 자신을 베려는 임금이 있다는 사실을
죽기 직전까지 되뇌인다.
그의 뛰어난 업적이 바로 이 '분노'와 인생의 '덧없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작가의 생각에 공감한다.

기자 출신의
고집스럽고 제 잘난맞에 살고 괴팍하고 똑똑한 소설가의 인정할 수 없는 가치관이 어떻게 녹아 있든,
이 숨막히는 임란 막바지의 서사시는
현재와 미래, 내 앞에 펼쳐진 분노와 고난의 시기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 네 말처럼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잘 못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앞과 뒤에 놓인 '칼'은 임란 중의 한 장군을 둘러싼 풍경만은 아니다.

칼을 목에 겨우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왜군이 무서워 돌아와 엎드린 아래 장수들만이 아니라
내게도 던지는 말 같아
아직도 머리가 곤두 선다.

자, '칼로 베지 못하는 것들도' 베어 보자.

 

 

 

[소 2003-09-05 ]

'삶의 무의미함과 싸운다'
정확이 어느 부분에 나오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말이 맘에 든다.

아래는 강금실이 기고했던 글이야

[법조칼럼] "칼의 노래" 를 읽고서


변호사로 자리매김한지 만 5년이 지났다. 꽤 길다고도 할 수 있는 그 세월은 내 나이 40의 고비를 넘어 세상 속으로 한참 걸어들어간 시절이기도 하다.
가끔씩 왜 개업을 하였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삶이 어떤 포부(抱負)로부터 시작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질문에 적절한 답은 세상에 보다 적극적인 뜻을 품게된 동기와 그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으로 미리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답이 없다. 내가 무엇으로 사는가에 앞서, 내가 어떻게 살아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결심조차 서있지 아니하며, 그 추상의 의문으로부터 단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막연히, 마치 “정복자 펠레”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펠레가 망망대해를 향하여 기약없는 인생의 길을 떠나듯이, 그냥 세상끝까지 걸어가보고 싶다는 그런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은 세상을 낯설어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이 어떠한 것인지 잘 모르기에 막연한, 천진함 같은 것이었던 듯하다.
희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깊이 각인되는 고통과 절망이 키워내는 세속 한가운데의 신기루이기 때문이다. 아마 미리 그 사실을 알고서 살아가지는 못하였으리라.
내가 세상 끝까지 걸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바닥의 촉감이 만져지는 듯한 시간들이 있다. 그 바닥에는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살아있기 전 삶의 기억을 담은 맨몸이 내가 죽어 사라지기 전의 시간 속에 살아있을 뿐. 그리하여 삶은 살아있기 전 죽음과 다음 죽음 사이에 놓인 짧은 간격일 뿐. 이 간격은 생명의 개화이자 죽음으로 가는 과정으로서, 모든 의미가 문득 끊어지는 죽음과 같이 그곳에서 삶은 순연하다.
그곳에서 살아있음은 죽음과 죽음에게 몸을 내걸고 아무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이 없는 삶, 순간순간에 그 바닥의 체험으로 긴장하는 삶이야말로 세상 끝에 놓인 지점이 아닐까.
나는 세상을 걸어가는 길에 지칠 때마다 길목에 기대어 서서 두려움 없는 기세로 세상을 베어내어 진면목이 드러나는 살아있음을 그린다.
그와 같이 길목에서 서성이다가 만난 책이 김훈의 “칼의 노래”였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바탕으로 한 1인칭의 전기적 소설이다. 김훈은 이순신을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로 묘사한다. 이순신은 조국의 남쪽바다에 눈보라처럼 몰려드는 적을 맞아서 그의 목숨을 내놓아 적을 베는 칼로 존재하였다.
그에게 삶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로지 죽음에 대면하여 수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삼엄한 자세로 죽음을 통과하는 방식만이 실재하였다. 300척의 배에 가득한 적 앞에서 12척의 초라한 함대를 이끌면서 그는 뒷걸음질치는 부하에게 이야기한다. 네가 죽음을 피할 곳은 없다. 오직 죽음으로 죽음을 뚫고나가라고. 그리하여 그는 역사에 기적으로 남는 승리를 이끌었다.
그에게 현실은 정치가 아니라 오직 바다였다. 그의 칼은 정치의 향방에 따라서 이동하는 세태가 아니라, 순전히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칼은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정치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는 그를 두려워했다. 그의 칼은 온전히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바다는 칼날을 겨루어 살아있음과 죽음이 교차하는 세상 끝 지점이었던 듯 하다. 이순신의 바다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죽음을 베어 살아있음이 한 자루 칼 끝에 놓여 있었으니, 그 살아있음은 기꺼이 삶을 버림으로써 죽음과 삶이 서로 다르지 않은 경계에 이르러 가능하였다.
김훈이 전하고자 한 이순신의 삶은 두려움이 없는 순결성으로 인하여 무서움에 전율케 하였다. 생을 넘어 바닥에 이른 삶을 산다면, 그를 영웅이라 부르겠다. 비속한 사람은 그 긴장을 이겨낼 힘이 도저히 없다. 비속한 나는 다만 김훈과 함께 잠시 그 살아있음을 만나서 마음 속에 눈물겹다.
세상을 베어 삶의 순결성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베이는 칼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드리고 싶다

 

[쥔장 - 2003-09-05 ]

나두 오늘 '칼의노래' 다 봤다.
마지막에 명나라 때문에 씩씩 거리면서...

교과서에는 '오랜 전쟁으로 인구가 격감되고, 농촌이 황폐해졌다'라고만 쓰여있는데...
그 한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이 서려있는지...

백성들이 진심어린 마음으로 육포를 만들어 바치고,
검을 만들어 바치고 하는 장면이 나오잖아.
그 당시를 내가 살았다면 나도 진심어린 마음으로 이순신 장군 앞에 엎드려
울 수 있는 백성이었을까?

난 아마 '다모'처럼 무술이 뛰어난 여자 의병 장군이 되어서 왜구를 무찔렀을지도 몰라...
나 쿵후 잘했다는 거 알지?
아니면... '여진'과 같은 운명을 살았을지도...

이순신 장군님의 품은 따뜻했을까?



추신) 혹시 '칼의노래' 보실 분들은 아래 제가 적어 놓은 역사적 사실을 먼저 읽고 나서
소설을 읽으시면 좀더 재밌게 읽으실 듯 하네요.

그런데 조,명 연합군에 관련한 부분과 왜군의 퇴각 이유는 너무 교과서답게 씌여 있네요...


< 국사책에서 옮깁니다. >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국방력이 점차 약화되어, 중종 때에는 3포 왜란을 비롯하여 왜구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비변사를 설치하였고,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적극적인 대책이 강구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장기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이 수습되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국내 정권의 안정을 위하여,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조선과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1592년 4월, 왜군이 침략해 왔다. 왜군이 침략해 오자, 부산진과 동래성에서는 정발과 송상현이 분전하였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한양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이에 충주에서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무기와 전력의 열세로 패하였다.

조선 조정은 왜군을 피하여 의주로 피난하였으며, 왜군은 한양을 점령하고 북상을 거듭하여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침입하였다.

육지에서는 전세가 불리하였으나, 경상도, 전라도 해안의 경비를 담당한 수군은 왜군의 병참 지원을 담당한 일본 수군의 침략을 저지하였다.

왜군의 침입이 있기 1년 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판옥선과 거북선을 만들고, 전함과 무기를 정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저장하였다.

그는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8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도 대승하였다. 마침내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게 되어,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을 좌절시켰다.

이러한 수군과 의병들의 승전으로 전황이 역전되면서 왜군을 격퇴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조선은 명에 원군을 요청하여 명군이 전쟁에 참여하였다.

조, 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수복하고 왜군을 남으로 내몰았다. 이 때 권율은 행주 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후 전쟁은 소강 상태에 이르고, 휴전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달라서 3년간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고, 다시 왜군이 침입하였다. 이에 조선군과 명군은 왜군을 명량으로 유도하여 일대 반격을 가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또다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점차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수군은 도망하는 왜선 수백 척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이순신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노량 대첩을 끝으로 7년간에 걸친 전란은 끝나게 되었다.